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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뭐라고 생각해? - 1

cakey 2025. 8. 1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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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운명을 믿어?”
 
은채의 질문에 지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운명 안 믿어.”
 
운명이라는 단어는 지연에게 늘 수동적인 냄새를 풍겼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주인공이 아닌 행인 같은 삶.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좋아하는 지연은 '운명적'이라는 말은 매력이 없는 단어였다.

그녀는 순간순간의 선택과 타이밍이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문장도 있었다.
"인생은 타이밍."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내 인생에 들어오는 것도, 그 관계가 흘러가는 모양도, 결국 선택과 타이밍의 결과일 뿐.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었다고 말이다.


은채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지연을 처음봤을 때, 지연이 다가가기 어려운 상대였다면
자신이 먼저 장난을 치며 거리를 좁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연은 그저 다른 여자 동호회 회원들과 비슷한 거리의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또 퇴사 후 은둔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같은 동호회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건 이미 수많은 확률을 뚫고 난 뒤였다.


둘은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싸움도 많았다.
지연은 힘들 때마다 ‘계속 이 관계를 이어갈까, 말까’ 수십 번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늘 둘이 함께 내렸다.
 
은채는 생각했다.
만약 지연이 심리적 회복 탄력성이 낮았다면, 마음의 상처를 핑계로 멀어졌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조언을 남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이었다면, 진지하게 대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싸우고, 멀어지고, 또 돌아왔다.
긴 세월이나 육체적인 유대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정서적인 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채는 문득 궁금했다.
‘그게 지연이 아니었어도, 내가 아니었어도 가능했을까?’


지연에게 은채는 특별한 존재였다.
은채가 해준 말들은 이상하게 크게 다가왔다.
사람 대 사람으로 깊이 와닿는 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지연은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답을 찾으며 성장해나갔다.
문제가 생겼을 때 “회피하지 마라”는 말,
“관계 맺는 태도를 바꿔봐라”는 말.
은채가 장난처럼 권해 사서 던져본 ‘운명의 주사위’.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을 몰래 나와서 건네며 “나 이거 너 주려고 사왔어. 구하느라 힘들었다. 기억해~”라며 웃던 얼굴.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이번만큼은 도망치지 말아야겠다고, 슬프더라도, 아프더라도, 상처받더라도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비밀이지만, 지연은 은채와 다툼이 있고 나서 먼저 다가가기 힘들 때 마다 주사위를 굴렸다.
이상하게도 항상 좋은 면이 나왔다.
그 사소한 우연이 변화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지연은 그 모든 것도 선택의 연속이 만든 결과라고 믿었다.
각자가 내린 선택과 결정, 그리고 그로 인한 결말.
운명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고민하고 노력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주사위가 굴러 멈췄다.
좋은 면이 위로 향해 있었다.
지연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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